물 만난 도시

물 만난 도시:파리 예술의 생명을 부여한 센 강 , 프랑스 중북부를 흐르는 센 강은 예술가의 뮤즈다.  한낮의 눈부심과 깜깜한 밤의 아름다움이 팽팽히 겨루는 곳.  문학과 철학, 예술이 와락 안겨들었다가 물길을 따라 흐른다.  텁텁한 한숨을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고 내쉴 유일한 공간일지도.  혹자는 “파리지앵이 되는 것은 파리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파리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고 했다. 먹구름이 하루건너 따라오는 파리의 겨울. 구름 사이로 새나오는 실낱같은 햇살아래 센 강변 카페테라스는 오늘도 만원이다. 글 길지혜 여행작가/ 사진 길지혜, 프랑스 관광청, pixabay 사진 설명: 금강 하굿둑

군산(群山)이란 도시는 참 오묘하다. ‘산의 무리’라는 뜻의 이름이 무색하게, 도시 내에 큰 산들이 없다. 도심 한편에 있는 월명산(101.3m) 정도가 눈에 보이는 ‘산’일 뿐, 도시 전체가 시야가 탁 트인 평지에 가깝다. 오히려 강과 바다에 잇닿은 ‘물의 도시’라거나, 서수뜰·임피뜰·십자뜰 같은 들이 드넓게 펼쳐지는 ‘평야 지대’란 말이 더 맞춤하겠다.

지도를 보면 그런 군산의 지형적 특성이 한눈에 드러난다. 북으로는 금강이 서천과 경계를 이루며 흐르고, 남으로는 만경강이 김제와 경계를 이루며 흐른다. 서쪽은 바다로 열려 있고, 동쪽만 익산과 맞붙어 있다. 삼 면이 물로 둘러싸인 반도 즉, 두 강이 만들어 놓은 널따란 선상지인 옥구 반도가 군산이란 얘기다.

그 때문에 군산은 1899년 일제에 의해 강제 개항된 뒤, 일제강점기 내내 호남평야의 쌀을 모아 일본으로 실어 가는 창구로 기능했다. 채만식의 소설 [탁류]에 일제강점기 당시 군산을 무대로 한 쌀의 수탈 과정과 부조리한 사회상이 잘 드러나 있다. 어디 소설뿐일까. 군산 곳곳에 당시의 흔적이 비교적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 흔적들로 군산은 지금 ‘근대와 현대가 중첩돼 매력적인 도시’가 됐고, 근대 안에 현재를 넘어선 미래를 조금씩 담아내 호평을 얻고 있다.

땅의 풍경이 제 색깔을 갖추는 동안, 강과 바다도 나름의 빛깔로 채색돼 한층 색달라졌다. 금강과 만경강은 국내를 대표하는 철새도래지가 되었고, 바다를 향해 열린 새만금방조제로 군산은 동북아의 경제 허브를 꿈꾸는 도시가 됐다. 이 과정에서 방조제 주변의 여러 섬이 연도교로 연결돼, 고군산군도의 일부 섬들은 육지가 됐다. 한 발짝 다가선 섬들로, 군산은 군산(群山)이란 이름의 진짜 주인인 선유도(옛 군산도)를 비롯한 몇몇 섬의 바다 풍경을 보다 가깝게 껴안게 됐다. 그래서 군산은 닫힌 듯 열려 있고, 끝인 듯 시작이다.

사진 설명: 금강 철새 탐조 모습 사진 설명: 근대와 현대가 공존하는 시간여행의 메카 , 호남 관세박물관(구 군산세관)

많은 이들이 군산을 ‘근대문화유산의 도시’라 칭한다. 우리나라에서 근대 일본식 건축물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니 어쩌면 당연하다. 콕 찍어 일제강점기에 건립된 일본식 건축물이 가장 많고, 곳곳에 일본인이 버리고 간 적산가옥도 많다. 대표적인 건물이 옛 군산세관과 옛 일본 제18은행 군산지점, 옛 조선은행 군산지점이다.

여기에 동국사와 신흥동 일본식 가옥, 초원사진관, 이영춘 가옥 같은 적산가옥이 더해지고, ‘뜬다리(부잔교)’와 째보선창 같은 수탈의 현장이 더해지면서 ‘현대 속의 근대’란 군산만의 독특한 풍경이 만들어졌다.

사진 설명: 군산 근대미술관(구 일본 18은행) -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 사진 설명: 동국사 / 초원사진관

군산 내항 부근에 있는 근대문화거리가 이 같은 ‘근대의 풍경을 만나기에 좋다. 군산 내항은 지리적으로는 금강이 바다로 흘러 나가는 지점에 있고, 경제적으로는 식민지 경제의 상징인 ‘미두장’이 운영되던 곳이다. 그만큼 일제강점기 수탈의 흔적이 빼곡해 과거를 반추해 볼 수 있는 곳이다.

그 출발점에 있는 곳이 군산 근대역사박물관이다. 옛 군산역과 미곡취인소 등을 재현한 근대생활관과 역사박물관이 있어, 수탈의 역사와 함께 그 시간을 기꺼이 버텨 낸 민초의 삶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부터 옛 군산세관(현 호남관세전시관))을 비롯한 장미갤러리, 옛 일본 제18은행 군산지점(현 군산근대미술관), 옛 조선은행 군산지점(현 군산근대건축관), ‘뜬다리(부잔교, 일제가 언제든 선박을 정박할 수 있도록 밀물과 썰물에 맞춰 위아래로 움직이도록 만든 부두 시설물)’, 째보선창 등이 가까운 거리에서 줄줄이 이어진다.

사진 설명: 군산 근대역사박물관 / 뜬다리(부잔교)

이 중 요즘 반드시 들러야 할 곳이 째보선창이다. ‘핫’해서이기도 하지만, 과거에 현재의 시간을 덧입혀 미래를 준비하는 공간인 ‘째보스토리1899’로 거듭나서다. ‘째보스토리1899’는 1979년부터 1997년까지 군산 수협의 동부 어판장으로 사용한 창고를 고쳐 개장한 수제 맥주 양조장이다.

군산 브루어리 마스터들이 군산의 맥아와 쌀을 원료로 만든 수제 맥주 16가지를 생산해, 해 질 녘 노을빛에 물든 바다를 보며 맛볼 수 있다. 덕분에 마냥 적막하고 쓸쓸하기만 했던 째보선창이 군산의 미래를 여는 또 하나의 과거가 됐다. 지난 시간은 때때로 그렇게 미래의 유산이 된다. 사람의 시간도 그럴 테다.

사진 설명: 째보스토리1899는 부둣가의 오래된 수협 창고를 고쳐 개장한 수제 맥주 양조장이다. gunsan-official 님 제공

▲ ‘째보스토리1899’는 부둣가의 오래된 수협 창고를 고쳐 개장한 수제 맥주 양조장이다. (출처 : @gunsan-official 님 제공)

Travel Tip
군산에서 ‘근대’를 만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
군산에서 근대의 흔적을 가장 효율적으로 둘러보는 방법은 ‘탁류길(구불6-1길)’을 걷는 것이다. ‘탁류길’에는 근대의 시간과 소설 <탁류>의 시간이 함께 고여 있다. ‘군산의 어제’를 보듬어 볼 수 있는 군산 근대역사박물관을 시작으로, 일제 수탈의 상징인 내항의 뜬다리와 옛 군산세관, 해망굴, 영화 <장군의 아들>에서 하야시가 게다를 신고 걸어 나오는 장면이 촬영됐던 신흥동 일본인 가옥(구 히로쓰 가옥), 국내에 남아 있는 유일한 일본식 사찰인 동국사 등을 돌아볼 수 있다. 총 6km 길이로, 걷는 데 2시간 정도가 걸린다.


사진 설명: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섬 여행 명소  /  바다의 만리장성이라 불리는 새만금 방조제

고군산군도(古群山群島)는 군산시에서 남서쪽으로 약 50km 떨어진 해상에 있는 63개의 섬을 말한다. 고려시대부터 수군 기지로 쓰였던 곳으로 많은 섬이 산처럼 보인다고 해, ‘산의 무리’라는 뜻의 ‘군산’이란 이름이 붙었다. 이 수군 진영이 세종 때 금강 하구로 옮겨지면서 군산이란 이름을 넘겨주고, 이들 섬은 ‘옛 고(古)자’가 붙은 고군산이 됐다.

선유해수욕장과 옥돌 해변이 있는 선유도가 섬 투어의 중심이고, 대장도에 있는 대장봉과 무녀도에 있는 쥐똥섬이 시원한 조망과 독특한 바다 풍광으로 인기다. 지난해 말에는 미국 CNN 선정 ‘아시아에서 가장 과소 평가된 장소 18곳’ 중 하나로 이름을 올리면서 외국인도 즐겨 찾는 명소가 됐다.

2023년이 마무리되는 이즈음, 낙조 풍광이 수려한 선유해수욕장에서 올해의 마지막 해넘이를 즐기고, 20여 분만 걸어 오르면 선유도의 바다 풍광이 한 품에 안기는 대장봉에서 2024년의 첫 해를 맞이하는 일도 의미 있겠다.

사진 설명: 대장도 대장봉 / 무녀도 쥐똥섬 / 고군산도는 가파른 오르막길이 없고 아름다운 풍광을 즐길 수 있어 ‘하이킹의 천국’이라 불린다.

▲ 고군산도는 가파른 오르막길이 없고 아름다운 풍광을 즐길 수 있어 ‘하이킹의 천국’이라 불린다.

사진 설명: 선유도 옥돌해변 / 선유도 옥돌해변 산책로 / 선유해수욕장에서 바라본 낙조
Travel Tip
군산의 맛, 짬뽕 군산은 ‘짬뽕의 도시’다. 짬뽕을 취급하는 식당도 많고, 전국적으로 유명한 짬뽕 맛집들도 많다. 심지어는 문화재청의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식당도 있다. 군산 앞바다에서 잡아 올린 싱싱한 해산물이 첫 번째 맛의 비결이고, 중독성 있는 칼칼한 국물과 쫄깃한 면발이 인기 요인으로 꼽힌다. 현재 동령길(장미동) 일원에 짬뽕 특화 거리가 조성돼 있고, 이곳에서 매년 ‘군산 짬뽕 페스티벌’이 열린다. 아직까지 군산 짬뽕의 정확한 유래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 때 돈을 좇아 군산으로 몰려든 중국인들이 초마면에 얼큰한 맛을 더한 것이 지금의 짬뽕으로 발전했다는 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