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운
예천을 간다고 하니 사람들이 물었다. “회룡포 가는 거냐?”고.
간혹 누군가는 삼강주막이나 활 얘기를 꺼냈고, 곤충을 보러 갔던 오래전 기억을 호출하는 이도 있었다. 용문사나 우주 체험 얘기를 스치듯 꺼내는 이도 있었고, “거기 세금 내는 나무 있지 않냐?”며 되묻는 이도 있었다. 드물게 누군가는 도정서원(읍호정)이나 선몽대 같은 낯선 지명으로 좌중의 귀를 쫑긋거리게도 했다. 둥글둥글 처마가 아름다운 금당실 얘기도 적잖게들 했고, 초간정과 병암정의 툇마루가 ‘멋졌노라’ 고백하는 이도 여럿이었다. 그 중 은근히 듣길 고대하며 기다린 말이 있었다. 그저 ‘내성천 물가가 좋았다’란 말이었다.
내성천은 예천 곳곳을 푸르고 느리게 휘돌다, 삼강리쯤에서 낙동강과 합류하는 100여km 길이의 강이다. 유난히 자주 휘어지는 데다, 휘어진 모퉁이마다에 고운 풍경들을 조롱조롱 매달아, 오래전부터 뭇사람들이 ‘시정을 돋게 하는 강’이라 말하던 물길이다.
오월이면 그 ‘시정 가득한’ 물길이 초록을 그득하게 담는 큰 그릇으로 변해 황홀하다. 그러니 부디, 하늘 맑은 유월 어느 날엔 예천의 물가를 찾으시라. 찾아 ‘녹음 내린 그 물가의 풍경’을 가만히 오래 바라볼 일이다. 온몸에 초록 물이 물큰 들 테다.
아무래도 예천에선 회룡포부터 찾아야 한다.
회룡포는 ‘육지 속의 섬마을’로 유명한 예천의 얼굴로,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이 350° 빙 둘러 흘러 마을을 섬처럼 가둔 곳이다. 어쩐지 예전만큼 물길이 유장하진 않지만, 예나 지금이나 마을을 휘감아 도는 내성천 물길의 곡선미가 빼어나다. 조망 포인트는 비룡산 중턱에 있는 회룡대. 이곳에 서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완벽한 물돌이동’으로 평가받을 만큼 아름다운 회룡포가 한눈에 드러난다. 이맘때면 특히 짙은 초록이 물가에 동그랗게 번져 그 모습 더욱 찬란하다.
회룡대가 회룡포 여행의 핵심이라면, 명물은 ‘뿅뿅다리’다.
뿅뿅다리는 한 사람 정도만 겨우 지날 수 있는 ‘구멍 뚫린 철판’으로 만든 가교로, 이 가교를 지나야 푸른빛이 도는 마을에 닿을 수 있다. 바람 좋은 오후, 뿅뿅다리 어디쯤 앉아 내성천 맑은 물에 발을 담그면 신록이 몸 안으로 담뿍 든다.
회룡포에선 또 이 땅의 마지막 주막이었던 삼강주막이 내성천 물길로 이어져 함께 둘러보기 좋다.
내성천과 금천, 낙동강 물줄기가 모이던 삼강 나루에 있어 삼강주막이라 불렸던 곳으로, 주모가 떠나 한 점 풍경으로 남은 옛 주막 옆으로 막걸리와 파전 등을 파는 주막촌이 형성돼 북적댄다. 그곳에서 노릇노릇 고소하게 구워낸 배추전에 막걸리 한 사발 마시면 세상 시름이 다 걷히겠다 싶다.
몇 년 전 내성천, 아니 내성천이 합류해 이룬 낙동강 물가엔 특별한 즐길 거리도 생겼다. 삼강주막 부근과 삼수정 부근을 잇는 쌍절암 생태탐방로다.
걷기를 좋아하는 이라면 삼수정과 쌍절암 생태탐방로 중 무장애 구간~삼강주막~회룡포를 이어 걷는 5~6시간짜리 코스를 권할 만하고, 1시간가량 가볍게 걷고 싶다면 쌍절암 생태탐방로 중 무장애 탐방로 구간만 왕복하길 추천한다.
무장애 탐방로 구간은 걷는 내내 내성천 푸른 물줄기가 옆구리께서 출렁대는 데다 온갖 형상의 바위를 보며 걸을 수 있어 지루할 틈이 없다. 물가로 수양 버드나무가 많아 초록이 사방에 가득한 것도 매력. 물가로 초록이 파문처럼 둥글게 퍼지는 것을 보며 걷는 것이 낙(樂)이다.
예천에는 물가를 따라 경관이 빼어난 정자도 여럿 있다. 대표적인 곳이 계곡 암반에 막돌을 쌓아 만든 초간정과 연못 주변 녹음이 아름다운 병암정이다.
초간정은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인 <대동운부군옥>을 집필한 초간 권문해가 지은 정자다. 계곡 가 바위 절벽에 걸쳐놓은 듯 자리해, 늙은 툇마루에 앉아 낚싯대를 늘이면, 시원한 계곡 바람이 잡혀 올라올 듯 풍경이 호기롭다. 건너편 송림에서 그윽하게 바라보는 정취도 제법 좋다.
초간정이 자연 속에 폭 안긴 형태라면, 병암정은 자연을 품 안으로 넉넉하게 끌어안은 모습이다. 이름처럼 병풍처럼 펼쳐진, 집채만 한 암벽 위에 번쩍 올라앉아 어디보다 그 풍치 뛰어나다. 정자에서 바라보는 바깥 풍경도 예사롭지 않다. 둥근 연못 안에 둥근 산을 두고 주위를 나무로 꾸며, 사월이면 온갖 꽃이 피고 오월이면 신록 우거져 여름까지 울창하다.
내성천 맑은 물길이 휘감아 흐르는 자리엔 선몽대와 읍호정, 삼수정 같은 정자도 꽃처럼 피었다. 호송면 백송리 내성천 강 언덕에 평화롭게 자리한 선몽대는 안에서 밖을 바라보기 좋은 자리다.
조선의 시인 묵객들이 수없이 다녀가며 시를 남긴 곳답게 풍치 한번 시원하다. 물가로는 수백 년의 시간을 건너왔을 소나무까지 울창해, 그 늙은 나무들의 그늘을 밟고 지나는 맛이 쏠쏠하다.
읍호정과 삼수정도 볕 좋은 물가 언덕에서 반짝댄다. 도정서원에 있는 읍호정은 큰 느티나무 아래에서 내성천을 바라보며 앉아 있고, 삼수정은 600년 풍상을 견뎌낸 회화나무 아래에서 낙동강을 굽어보며 서 있다. 그래서일까, 오월의 강을 지나온 바람이 툇마루까지 닿는 듯, 정자 그늘 저 깊은 곳까지 오월의 푸른 그림자가 그득 찬다.